당신 빼고 다 가본 서울의 핫 플레이스

 

“강남에서 보자” 처음 상경했을 때 생경했던 풍경만큼이나 낯설었던 이 말은, 서울과 지방이 분명 다름을 나타내는 방증이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대전에서는 친구들과 술 약속이라도 할라치면 보통 ‘시내에서 보자’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서울은 대전과 비교가 안될 만큼 만날 장소가 많다. 강남, 코엑스, 건대, 홍대, 이대, 신촌, 이태원, 연남동처럼 가볼 곳도 즐길 곳도 즐비하다. 낮이면 세련된 사람들이 기라성처럼 늘어서고 밤이면 점포들이 불야성을 이 뤄, 자주 찾아도 식상하질 않았다. 

 

 

처음 보금자리를 펼쳤던 금호동은 금남시장과 왕십리, 그리고 한남동까지 나다니기 좋았다. 금호동에서 대사관로 쪽으로 가다 보면 고급 멘션과 다른 나라 대사관들이 있었는데, 생소한 건물과 사람들 모습을 눈에 담는 재미가 있었다. 

 

 

 

금호동에서 살림을 시작하고 2년도 못 채운 채 이사를 했다. 서울 동쪽에 있는 천호동이었다. 주택가에 살았는데, 5분만 걸어가면 오래된 홍등가가 있었다. 낮에는 아이들 뛰노는 소리가 골목을 메웠지만, 땅거미가 지면 빨간 불이 켜지는 아이러니한 동내였다. 그때 살던 반지하 자취방에서 조금만 걸으면 한강 고수부지로 나갈 수 있었는데, 돗자리를 챙겨가 자리 잡고 풍 경을 안주 삼아 맥주를 마시곤 했다. 자취방에서는 남의 발목을 보며 살았지만, 신세타령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는지 일부러 여유를 부렸던 것 같다. 

 

 

세 번째 보금자리였던 봉천동은 나같이 철새 같은 사람들이 머무는 동내였다. 당시 사귀었던 여자친구가 길 건너에 살았다 보니, 내 집보다 그 집에 머물 때가 더 많았다. 봉천동은 즐거 운 기억과는 거리가 멀었다. 여자친구와 밤새 싸웠던 기억, 발목이 부러져 6개월이나 장애와 싸웠던 기억, 높다란 아파트 사이에서 ‘왜 나 같은 사람은 저런 데서 살 수가 없지’ 따위의 기 억들만 떠오른다. 내 인생에서 가장 우울한 시대였다. 

 

 

 

그다음에 찾은 곳은 이태원이다. 총각 신분으로 마지막 이부자리를 펼쳤던 곳인데 즐거웠던 기억이 가득하다. 사실, 이태원에 살았다고 말하지만, 정확히는 남산 중턱에 있는 달동네인 해방촌에 살았다. 해방촌을 관통하는 마을버스가 중간에 정차하던 곳이었다. 요즘에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지만 당시만 해도 해방촌에 산다고 하면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보니 알아듣기 편하라는 뜻에서 이태원에 산다고 했었다. 해방촌은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된 다음에 촌락이 자리 잡은 곳이다. 6.25전쟁 때, 북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이 고향으로 올라가지 못한 채 눌러앉은 곳으로 서울에서도 꽤 주름살이진 동네라고 할 수 있겠 다. 해방촌은 각양각색의 매력이 있어 이야기를 풀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를 정도다. 그중에 서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는 곳을 꼽지면 바로 ‘남산순환도로’되시겠다. 

 

 

남산 순환 도로의 가을

 

남산순환도로는 해방촌에서 가장 높은 지대인 해방촌 오거리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보이는 편 도 2차선 도로다. ‘남산순환’이라는 표현처럼 남산을 한 바퀴 돌 수 있는 도로다. 이 도로 덕 분에 달동네인 해방촌은 보기보다 교통이 편리한 동내가 되었다. 남산순환도로까지만 올라가 서 402번 버스를 타면 강남으로 30분이면 나갈 수 있고 숭례문은 걸어서 나갈 수도 있었다. 이 도로는 남산 허리 즈음에 있다 보니 산책하며 즐길 것이 많다. 봄에는 꽃, 여름에는 녹음 가을에는 사각거리는 은행잎, 겨울에는 눈꽃까지 막걸리 잔을 기울인다면 찰떡같은 볼거리들 을 품고 있다. 도로변을 걷다가 마음이 내키면 남산타워까지 오르기도 쉽다. 곳곳에 있는 둘 레길은 한적해 머리를 비우기에도 딱이다. 

 

밤이면 분위기가 달라졌다. 자정 즈음이 가까워지면 고급 자동차 소리가 들리곤 했는데, 적당 히 굽이진 도로가 드라이브하기에 좋아서 그랬던 것 같다. 밤공기를 가르며 달리다 보면 오른 쪽에 남산 풍경이, 왼쪽에는 서울 야경이 펼쳐졌으니 서로의 마음을 훔치려는 남녀들에게도 좋았으리라. 

 

새벽 2시가 넘어가면 또 다른 세상이 열렸다. 남산순환도로 인도에 일정한 간격으로 여성이 서 있을 때가 있었는데, 그들은 정말 여자 화장실에 가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남산순환도로는 성적 지향이 일반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만남의 장소로 이용하는 곳이기도 했다. 

 

해방촌에서 3년 하고도 절반을 살았다. 그곳을 떠나와서도 남산순환도로가 유독 기억에 남은 까닭은 이런 다채로움이 아닐까 싶다. 조용히 걸을 수도 있고 편히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고 풍광과 계절을 느끼며 술도 마실 수 있으며 문명의 이기를 느낄 수 있는 데다, ‘일반적’인 가치가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도 볼 수 있는 곳. 한 마디로 야누스의 도로랄까? 그래서 서울에 와본 사람이라면 꼭 이곳을 권하고 싶다. 

 

 

남산순환도로는 강남역에서 402번 버스를 타거나, 녹사평역에서 5번 마을버스를 이용하면 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