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푼 꿈을 안고 서울에 올라와 방송 아카데미 문을 두드렸습니다. 입학을 위해 치렀던 카메라 테스트가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너무 엉망이었거든요. 비장한 마음으로 학원에 다녔습니다. 공교롭게도 제 동기들 대부분은 수도권 출신이었고, 이미 잘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저는 나이 든 아저씨였죠. 저는 정말 미친 듯이 연습했습니다.
아나운싱을 배우던 어느 날 선생님이 “현채야 너 고향이 어디니?”라고 물었습니다. 제 말에 은근히 섞인 사투리를 알아 채신 겁니다. 충청도 대전 사람은 거의 표준어 같은 사투리를 구사합니다. 가볍게 들으면 알아채기 어렵지만, 길게 말하거나 긴 문장을 낭독해 보면 사투리가 들립니다. 표준어 같은데 묘한 억양이랄까요? 충청도 사람을 웃기게 표현하려는 ‘그래유~ 저래유’와는 결이 다릅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긴 말을 할 때 사투리 억양이 두드러져 정돈되고 편안한 느낌의 말을 하지 못한다는 걸 말입니다. 아나운싱을 배울 때 첫 관문은 ‘평조’연습입니다. 말을 할 때 말의 음 높이가 있습니다. ‘음가’라고 합니다. 소릿값이지요. 이 소릿값이 모여 억양을 만들어냅니다. 아나운서의 억양은 도드라지 않으면서도 정돈된 음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억양을 만들기 위해서 첫 번째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억양을 손보는 것입니다. 저처럼 지방 출신인 사람일수록 이 연습이 중요합니다. 독특한 억양이 생기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조 연습이 바로 손보기입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유현채입니다’라는 문장을 일정한 음가로 낭독하는 것입니다. 어떤 문장이든 평조로 낭독하는 방법으로 연습하면서 아나운서처럼 표현하며 낭독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원고나 책을 낭독하게 됩니다. 이 연습법은 아나운서 한석준 씨가 최근에 쓴 ‘한석준의 말하기 수업’에도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제가 이번에 기회가 되어 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도 저와 비슷한 경험과 고민을 했구나 싶더군요. '한석준의 말하기 수업'은 아나운서 한석준 씨가 방송인으로 자신을 갈고닦은 방법을 정리한 책입니다. 스피치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위한 지침서입니다.
이 책은 한석준씨가 아나운서가 된 뒤로 스피치 트레이닝을 해온 방법과 그가 겪었던 고충을 중심으로 기술된 실용서입니다. 다른 스피치 책과 차별화된 점이 있다면, 방송인으로써 경험한 사례나 유명인과의 교류한 내용들도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점에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아쉽게도 방법론 중심의 실용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제가 스피치 강의를 할 때 꼭 언급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중 서점에 판매되는 스피치 책 대부분은 비슷한 구성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발성, 발음을 중심으로 한 전달력과 표현력 쉽게 말하기 조리 있게 말하기, 상황별 말하기 등을 다룹니다. 제가 경험한 사람들은 스피치 ‘방법’을 모르기보다는 ‘심리’와 ‘기질’에 측면에서 고충을 겪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방법은 잘 알고 있었지요. 스피치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공부를 안 했을리가 없을겁니다. 다만 알고 있는 대로 몸이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인 것이지요.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발화(말문)을 열지 못하는 상태 말입니다.
한석준 씨는 저처럼 스피치 코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는 KBS 아나운서 출신입니다. 업력으로 보면 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위치에 선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점에 대해서도 충분히 고찰을 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번 책은 제 생각보다 더 방법론에 치우쳐있어 아쉬움을 감추기 어려웠습니다. 좋은 책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스피치 능력 향상을 위해 꼭 이책을 읽어야하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그렇다고 답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다음에도 스피치 책을 쓴다면 제가 언급한 점까지 다뤄졌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짧은 평을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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