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에도 덜덜 떨면서 냉면을 먹을 수 있다면,
당신은 냉면으로 흥분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처음 냉면과 마주했을 때는 그리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제 기억이 맞는다면 아마 여덟 살 때일 겁니다. 대전 한복판에 있던 사리원 면옥에서 내면을 맛봤을 때가 말이죠.사실, 정확히 그날 냉면을 맛보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짜장면 타령을 하며 칭얼댔거든요.
사리원 면옥은 대전에서 손꼽히는 냉면집 중 하나였습니다.
평양식처럼 두툼한 면발이지만, 육수 맛이 분명해서 평양식이라고 할 수 없는 냉면입니다. 밍밍하되 잘 끊어 먹을 수 있는 평양식, 분명한 맛이 있지만, 질긴 면발 때문에 먹기가 쉽지 않은 함흥식의 중간이랄까요?
대전에서 사리원 면옥은 제법 알려진 맛집이었습니다. 부모님은 물론 어른들은 여름이면 그곳을 찾았죠. 저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찾았습니다. 대전 시내에서 제법 걸어 들어가야 하는 곳에 있었지만, 발걸음을 실망시킨 적은 없었습니다.
대학시절에는 학교 구내식당에서 냉면을 자주 찾았습니다.
2,500원이란 값싼 가격에 먹을 수 있던 그 냉면은 MSG가 과하게 들어가서 그런지 매일 먹어도 질리지가 않았습니다. 거의 매일 찾다 보니 냉면을 내어주는 조리사와 눈만 마주쳐도 곱빼기로 나오곤 했지요. 상경한 뒤로는 냉면을 자주 먹지는 못했습니다. 지리에 밝지도 못했고, 요즘처럼 맛집 지도 같은 것이 있지도 않았으니까요.
2007년에 우연히 냉면집 한곳을 찾았습니다.
그때 저는 (주) 세티즌에서 일하고 있었죠. 그때 세티즌은 2호선 선릉역 근처에 있었습니다. 선릉역 일대에는 직장인을 상대로 하는 먹자골목이 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로 붐비는 그곳에서 냉면집을 찾았죠.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곳은 대로변이 아닌 골목 어귀에 있었습니다. 골목을 눈여겨보며 걷는 사람이 아니라면 눈에 띄지 않을만했습니다.
세티즌을 떠난 뒤로도 선릉에 가는 날이면 그 냉면집을 찾아갔습니다. 새콤하면서 진한 고기 육수에 굵은 면발이 기억납니다. 사리원 면옥 냉면과 비슷했다고나 할까요? 매운맛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3단계까지 있었을 겁니다.
그 뒤로 해가 몇 번 바뀌고 강남보다는 강북에서 주로 나다니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한국의 중심지라고 하는 광화문과 서대문 일대가 일하는 무대가 되었지요. 그리고 뒤늦게 알게 됩니다. 서울 최고의 냉면집들이 주로 강북 그것도 종로와 충무로 일대에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청계천로 우래옥, 동국대 근처의 필동면옥, 을지로 3가 공구상 골목에 있던 을지면옥. 재미있는 사실은 이 냉면집들은 모두 '평양냉면'가게라는 겁니다. 새콤하면서 감칠맛 도는 함흥식이 아니라, '이게 무슨 맛이야?'라고 할 정도로 아무 맛도 나지 않는 것 같은 평양식 말이죠.
평양식 냉면은 엄밀하게 '맛이 있다'라고 하기 쉽지 않습니다. 맛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無'에 가깝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맛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지만, 그 묘한 맛에 빠지면 말입니다. 평양냉면만 찾게 될 수 있습니다.
실은 제가 그랬습니다. 맛이 없는데 있어... 그 묘한 맛에 빠지고 나니 함흥식은 거들떠도 보지 않게 되더군요. 한 그릇에 최소 11,000원이나 하는 냉면을 (당시 점심값은 7천 원 대)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찾았습니다. 그것도 위에 나열한 가게들을 돌아가며 말이지요.
평양냉면의 맛은 무명천 같다고나 할까요?
화려하지 않은데 질기고 깊은 맛이 있습니다. 여기에 고명으로 어떤 변주를 주느냐에 따라 또 달라집니다. 치장보다 본질이 중요하다는 말이 이런 거구나 싶기도 하죠.
그렇게 서울 중심부에서 냉면을 즐겼지만, 이별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무슨 거창하게 이별이냐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남쪽으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했으니 자주 찾기는 어려워졌으니까요. 그래서 이별했다고 칩니다. (그래도 강북에 올라갈 일이 있으면 들르곤 합니다.)
서울시민에서 경기도 용인시민이 된 제게는 또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그중에서는 평양냉면집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곳은 이사 간 집에서 멀지도 않았습니다. 걸어서 10분도 걸리지 않는 곳에 있었으니까요.
어디냐고요?
바로 '피양랭면 전문점 기성면옥'입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곳은 꽤나 알려진 맛집이었는데요. 이사 들어갈 집 근처를 둘러보다 우연히 찾게 되었지요. 지금 사는 집을 계약하기 직전에, 동네 편의 시설과 지하철역까지의 동선을 확인하기 위해 걷는 중에 말입니다. 동네를 돌아보다 마침 시장기가 왔고 좋아하는 냉면이 눈에 보였으니 마다할 리가 없었습니다.
메뉴판부터 예사롭지 않더군요.
주문을 하고 나니 오래되지 않아 음식이 나왔습니다.
맑은 국물에 두툼한 메밀면 그리고 고기, 계란, 무 고명이 올라간 평범한 냉면이었고, 식탁에 고춧가루가 보이지 않는 걸 봐서는 있는 그대로 먹는 게 좋아 보였습니다. 안내 대로 식초와 겨자를 넣지 않고 육수를 맛보니 깊은 소고기의 풍미가 올라왔습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육수 맛을 감상한지 10분도 되지 않아 냉면 한 그릇이 모두 제 몸으로 사라졌습니다. 배고파서 그랬다기보다 정말 맛있었다고나 할까요?
특히, 순백의 무김치가 별미였습니다. 보통 냉면집 무김치는 김치라기보다는 단무지처럼 새콤한 맛을 가졌습니다.그런데 이 무김치는 살짝 짭조름한 맛만 있었어요. 산미가 거의 없이 말이죠. 냉면부터 반찬까지 과하지 않고 절제된 모양새였습니다.
저는 이곳을 찾은 뒤로 다른 냉면집은 거의 찾아가질 않았습니다. 가끔 강북에 일하러 나갈 때 본래 찾아가던 곳들 문을 두드리는 정도랄까요? 집 앞에 맛있는 평양냉면집이 있는데 물어서 멀리 갈 필요가 없었지요. 이 포스팅을 쓰고 있으니 그 맛이 또 떠오릅니다. 이번 주는 꼭 가서 한 그릇 비워야겠어요.
오늘의 생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