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 집에서 일을 보고 있는 와중에 겨울이 코앞까지 왔다 싶었다. 한밤중에도 더운 바람을 부르려 창문을 열어야 했는데, 서늘한 기운에 창문을 다고 있었으니 말이다. 어떤 사람이건 비슷하겠지만, 계절이 바뀔 때면 채비를 한다. 뼈에 스며드는 추위와 싸울 채비랄까? 겨울 옷을 꺼내기는 당연하고, 보일러에 문제가 없는지도 살핀다. 선풍기는 먼지를 불어내고 몸 구석구석을 닦아 창고에 넣는다. 겨울에 정장 만으로는 추위를 피할 수 없다 보니 따뜻한 원단으로 지은 코트를 꺼내 세탁한다. 이렇게 겨울 맞이 준비를 하면서
마지막으로 하는 일은 시곗줄 바꾸기다.
사람을 챙겨줄 만큼 똑똑한 스마트 워치가 대세인 세상이지만, 나는 아날로그시계를 좋아한다. 동전만 한 작은 시계 얼굴에 오밀조밀하게 채워진 글자를 보는 재미가 있고 그 위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리는 핸즈(시침과 분침 초침을 말한다)를 감상하는 맛도 있다. 남들은 지위나 재력을 보이려고 시계를 찬다고 하지만, 나는 그러기엔 벅차다보니 시계를 몇 점 가지고 있지만, 값 비싸지는 않다. 공적인 자리와 사적인 자리에 맞게 아니면 차림새에 걸맞는 정도로 구색을 갖추고 있다
평소에는 주로 다이버 시계를 찬다. 이름대로 바다에 잠수하는 잠수부들을 위한 시계다. 수압을 견디는 능력은 다이버 시계 능력의 알파요 오메가다. 그만큼 두툼한 남성미를 자랑하는 시계들이 보통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시계는 다이버 시계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지고 두루 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세이코사의 SKX007이다. SKX007은 200미터(20기압) 수압을 견딜 정도로 견고하면서도 기계식 시계하면 떠올리는 오버홀(완전분해조립, 정비)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우직하다. 굳이 비교하자면 진흙탕 속에 넣었다 꺼내 쏴도 멀쩡하다는 구 소련의 AK47 소총과 비슷하달까? 이 정도로 믿을 수 있고 신경 쓸 필요도 없으며 담백하게 생기기까지 해서 시계 애호가 하면 한 점쯤은 가지고 있거나 가졌을 법한 시계다.
나 역시 SKX007을 가지고 있는데, 여름이면 스테인리스로 된 시곗줄을 쓰지만 겨울이면 손목이 시렵기도 해서 가죽 줄로 바꿔준다. 올해도 어김없이 시곗줄을 바꾸며 겨울을 시작한다. 이왕이면 기분을 내는 샘으로 묵혀둔 가죽 줄을 꺼내들었다.
줄 바꿈질을 하는데 특별한 가술은 필요가 없다. 전용 도구로 줄과 시계 몸통을 이어주는 봉을 빼고 그 봉을 바꿔줄 줄에 넣어 다시 시계에 달아주면 그만이다. 그렇게 새 줄을 입혀준 시계를 손목에 올려보니 생각보다 어색했다. 시계와 줄이 어우러진 모습은 제법 보기 좋았는데, 내 손목과는 따로 놀고 있는 기분이랄까? 그렇다고 어울림의 문제는 아니었다. 시계와 줄 그리고 손목은 궁합이 잘 맞아 보였지만, 영 불편했다.
시계를 풀어보니 아직 가죽 줄에 길이 들지 않아 아직 뻣뻣한 것이 문제였다. 줄이 구부러지며 손목을 휘감으면 좋으련만, 오래 모셔둔 탓인지 운동을 게을리한 중년 아저씨같이 뻣뻣했다. 이렇게 길이 덜든 줄로 시계를 차면 손목이 아프기도 한다. 그렇다고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냥 찬다. 본래 생명을 담던 그릇으로 만들어진 줄이니 차다 보면 내 손에 맞게 변하리라고 믿으며 말이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시계를 차고 있으면 아무리 뻣뻣한 줄이라도 길이 들기 마련이다. 늘어나고 휘어지며 사람 손목을 편안하게 휘감게 모습이 변한다. 길이 드는 데까지 불편함은 있지만, 감내할만 하다.
생각해 보면 사람 사는 것도 다 이런 일의 연속인 것만 같다. 무엇을 배울 때도 그렇다. 처음에는 단어 뜻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생각을 물리고 보고 또 보다 보면 익숙해져 다음 의미가 이해되기도 한다. 글쓰기도 그렇다. 처음에는 유치한 문장에 좌절하기도 하지만, 쓰고 또 쓰다 보면 익숙해지고 은유법이니 구성이니 하는 기술들도 얻는다.
연애도 그렇다. 처음에는 좋아한다는 말조차 꺼내기 힘들지만, 관계를 만들고 이어가다 보면 자기와 꼭 맞는 사람에게 좋아한다고 말도 수월히 꺼내게 된다. 다만, 누군가는 그 고비를 넘을 때까지 묵묵하게 걸어보고, 누군가는 ‘난 본디 재능이 없으니까 안됨’하고 단념하기도 한다. 묵묵히 걷는 사람은 결국 얻지 못할지언정 어떤 계기는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한두 번 해보고 그만두는 사람은 왜 그것이 되지 않는지 이유도 알기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니까 모든 건 때가 올 때까지 묵묵히 해보기가 득되지 않을까? 시
곗줄을 바꾸자마자 아프다며 집어 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